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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이 저녁 그대가 화분을 들고 / 아무 쓸모없는 내 노래 속으로 걸어 들어올 때 / 나는 여태 악몽 따위로 시나 쓰는 / 젖은 지붕이어서 / 누군가에게 / 누구 아니냐고 미소할 수가 없다” - <나는 장마에 대하여 다시 쓴다> 중 어느 날 길고 긴 계단을 혼자서 오른 적이 있다. 계단을 모두 올랐을 때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자 남아 있던 봄꽃 몇이 계단으로 떨어져 내렸는데, 마치 봄이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꽃보다는 그 꽃을 품어 안아야 할, 그 꽃이 굴러 떨어지는 것을 지켜 보아야 할 계단이 더욱 안쓰러운 느낌이었고, 그래서 기껏 올랐던 계단을 다시 내려 온 적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계단에서 지상으로 폴짝 뛰어 내리는 순간 여름이 되었다. “왜 자꾸 내겐 / 꽃이 덫으로 읽힐까?” - <극단적> 중 커다란 꽃이 프린트 된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를 보았다. 커다란 화분 하나가 클로즈드 팻말을 대신하는 까페 앞이었다. 여자와 나는 자리를 비운 주인을 기다렸지만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가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고, 내가 고개를 내려 여자를 보려고 했을 때 이미 여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주인이 돌아와 문 앞의 커다란 화분을 치웠지만 나는 까페에 들어가지 않았다. 저녁의 영혼 남들은 꽃이야 피고 지는 거라지만 나는 저 흰 꽃의 사활이 끔찍합니다. 그대, 내게 스며들었던 전부여. 정염에 어쩔 줄 모르던 그 시절이 나의 생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홀가분하겠습니까. 이제는 몸 없이 목소리도 없이 자꾸 불어와 애도하고 가는 그늘이여. 영혼은 낮과 밤이 아니라 그저 잠시 어두워지며 사그라지는 이 저녁에만 있으니 저 흰 꽃 가여워 뼈도 없고 살도 없습니다. 남들은 꽃이야 피고 지는 거라지만 깃들었다가 떠나는 모든 것들의 자리가 나의 생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홀가분하겠습니까. 개와 늑대의 시간, 임무를 교대하는 근위병처럼 꼿꼿한 하늘을 뒤로 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단 한 번의 삶에 딱 한 번의 마주침, 이라고 혼잣말 하였다. 나의 보행을 가로막는 것은 각종 방지턱이 아니라 자꾸 시선을 빼앗는 지는 꽃이야, 라고 혼잣말 하였다. 나의 혼잣말을 누군가 들을 새라 얼른 어둠이 짙어지기를 바랐다. 아무데도 깃들지 못한 한줌 마지막 햇살이 내 어깨에 잠시 머물렀다가 떠났다. “인간이나 짐승이나 / 어둠을 지나서 살러 가는 모든 것들은 / 그저 어둠에 대한 고백일 뿐.” - <다시 어둠 속에서 내가> 중 하루 일과를 잘 마친 날에는 침묵이 선물처럼 주어졌다. 당연한 기다림 끝에 찾아온 애인과 전봇대에서 막 떼어낸 전단처럼 소박한 식사를 하는 동안, 애호가의 성에 차지 않는 음악처럼 어두운 저녁이 침묵 사이로 차근차근 스몄다. 어둠은 조금씩 숙성되었고 침묵은 그사이 발효하여 우리를 조금 앞질러 갔다. 첨탑처럼 길게 드러누운 그림자와 함께 그녀가 그 뒤를 따랐다. “꽃을 만져 눈이 멀었다 // 내가 아직도 칠흑 속에 있다고 절규할 때 // 그대는 어째서 // 내가 볼 수 없게 된 것들보다 아름다운가.” - <미소에 관한 질문> 중 나는 사실 이응준의 시집 《애인》과 깊게 조응하지 못하였다. 탐미주의자인 소설가가 쓰는, 그의 풍토가 키워낸 시가, 그 시가 피워낸 꽃을 바라보기는 하였다. 바라보기는 하였으나 만지지는 못하였고, 그래서 나는 눈이 멀거나 하지는 않았다. 뻗었던 손은 꽃에 닿기 직전 움츠러들었다. 그저 그렇게, 몸 가까이로 회수된 손이 남긴 희끄무레한 궤적, 텍스트로 변태한 그 궤적만이 남겨졌다. 이응준 / 애인 / 민음사 / 115쪽 / 2012 (2012)
국가의 사생활 을 통해 우리 시대 통일 문학을 새로 개척하고, 본격 로맨틱 코미디 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 이 출간 즉시 드라마화가 결정될 만큼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소설가 이응준. 그가 또 다른 껍질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번에 그가 보여주는 것은 10여년 동안 감추고 있었던, ‘시인’ 이응준의 세계이다. 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 이 사랑을 소설로 풀어냈다면, 시집 애인 은 ‘연애의 모든 것’을 시로 풀어냈다고 볼 수 있다.

세기말의 슬픈 청춘의 초상을 노래했던 이전 시집과 달리, 애인 에서는 사랑의 생생한 건강성에 대해 노래한다. 비바람과 천둥 , 캄캄한 동굴 , 사막과 뜨거운 지옥 을 건너온 자의 사랑을 노래한다. 살과 뼈 는 온통 비바람에 흩어 져 버렸고, 청춘 은 천둥과 함께 흘러 가 버렸다. 감당하기 어려운 젊음의 무게에 괴로워하던 청년의 모습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오히려 가장 순수한 소년, 영원한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 유리창에 한 글자 한 글자 깎아 새겨 넣은 듯한 섬세하고 예리한 문체는 그대로 독자의 가슴속에 각인될 것이다.


단 한 사람
연인
생일
피의 조건
애인
나는 장마에 대하여 다시 쓴다
자서전
맨 처음
이 아이를 보게 되면
저녁의 시
1989
슬픔의 논리
창문 아래 잠들다
극단적
버드나무군락지
파계
밤의 수화
주기도문
東京

안개
외국인선교사묘지
검고 깊은 것들의 일면
희망의 불복종
고해


안개와 묘비명과
김산
체리
유서를 쓰는 즐거움
나는 진실하다

종려주일
그 당신이 나를 지나간 뒤에는
빈 숲 요양원
적도에서 온 편지
여러 해 지난 뒤
투병기
어머니
고적대는 지나간다
겨울 그림
천국의 북쪽
애도하는 버릇
묵인
이 책의 한 귀퉁이
포옹
묵주기도
은접시 위에 있던 것들
夏至
나무 아래 쉬고 있던 것에 대한 회고
주일
저녁의 영혼
유리병 속 지문
다시 어둠 속에서 내가
밤과 낮
비애
저 계단
미소에 관한 질문
冬至
오명
해명
보내지 못한 엽서
서시

산문/개와 예술에 관한 몽상

발문/장은수
시여, 사랑이여, 비극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