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블로거가 어느날 블로깅을 하였다.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 이옥이라는 이름을 처움 보았다. 그 블로거의 블로그에서. 생소한 그 이름에 호기심이 일기 시작하였고, 결국 그 이름 때문에 책을 사게되었다. 그러나 한동안 다른 책에 밀려 전혀 손을 대고 있지 못하다가, 2018년 년 2월인 지금에서야 겨우 책을 볼 수 있게되었다. 제목에서 풍기는 냄새가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라는 부분이 글을 쓰는덴 반시대적 글쓰기가 필요하단 뉘앙스를 받게되었다. 글을 쓰는데 꼭 반시대적이어야하는가의 읽기전 느낌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럴수도,,,라는 감정으로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 같았다.이옥이란 인물은 18세기 조선 정조때 인물로 정조의 눈에 찍혀 구박받던 인물로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하찮은 별, 미미한 발광체"라는 표현이 그럴 듯 하다. 그러나 또한 저자는 바로 그를 "미미한 존재감이 빛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거대한 별들(연암, 다산, 정조)이 뿜어내는 찬란함 속에서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를 역설적 빛나는 존재라밝히고 있다. 무슨 말인가. 시대적으로 대단한 문장가들인 연암이나 다산, 정조의 화련한 배경속에 미미한 존재이긴 하나 그만의 색체를 지닌 이옥이라는 존재가 역설적이게도 그자신의 모습을 보일 수 잇었다는 것이 그를 빛나게 한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 이옥은 정조의 눈 밖에 난 사람이다. 문체반정을 시행한 정조의 "강고한 문체정책 소용돌이"속에 그의 글들은 잡문체에 속하였고 그런 그를 정조의 본보기(?)로 그를 희생한 것이다. 그를 제외하고도 많은 사람들이 소품 등 잡문체를 사용한 박지원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들은 나름 이름있는, 혹은 뼈대있는, 건드리기 쉽지않은 사람들이었고, 그에 반해 이옥은 참 쉬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탄압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옥은 구박을 심하게 받았다. 현대에 와서도 그런 인물들은 넘쳐나지만 대우가 다르다. "1792년 정조의 강고한 문체정책 소용돌이 휘말린 후, 1800년에 완전히 삼녀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이옥은" 조금이나마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관직을 포기한 것이다. 얼마후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이옥은 체념적인 세상과 등진 생활을 선택한다. 그리곤 자신이 쓰고 싶은, 쓸 수 있는 것을 쓰며 살았다. "쓰는 것 외엔 달리 출구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저자는 추측한다. 그러나 그의 성격상 그저 자신이 쓰고 싶은글을 쓰며 사는 것도 나쁘지않을 것이란 생각, 그의 과거 경험들을 통해, 그런 생각을 갖게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개인적으론 그의 글들을 만나면서 이상의 글들과 이외수의 초기 글들(들개 같은)이 생각이 났다. 자신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현실을, 벗어나고픈 욕망과 욕구와 허탈사이에서 느끼게되는 그런 감정들이 그들의 글에서 겹쳐보였다. 그러나 갖게되는 상실감은 전혀 다른 것이리라 생각된다. 저자는 말한다. "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읽고 쓰는가?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필연성을 믿기 위해서? 그런 민음이 필요하다면 굳이 읽고 쓸 필요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않아도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읽고쓰는 것은 그런 민음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가 최선의 시대 임을 거부하기 위해, 아니, 최선의 시대 같은 게 있을 거라는 믿음을 거부하기 위해,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자명한 것임을 거부하기 위해, 우리는 읽고, 도 슨다. 나는 그러기 위해 이옥을 읽는다. 단지 그가 애처로운 희새양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삶의 부침 속에서 보여 준 기이한 용기,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일관된 어떤 태도가 주는 묘한 감동 때문에 이옥을 읽는다." 그렇다. 우리는 반시대적이라는 그의 글이 아닌 그가 보여준 그만의 방식이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고, 그만의 글이 그만의 시대적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 당시의 그의 글은 상당히 보편적 글스기에 지난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이옥이라면 그는 지금도 또 다시 반시대적 글쓰기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인듯 싶다.다채로운 글쓰기, 다양한 글쓰기가 주된 요즘, 그러나 그 사이에서도 반시대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그래서 대중의 눈 밖에 나기도, 혹은 컬트적인 팬을 몰고다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푸코가 말했다시피 "규범성에대한 저항은 어떤 면에서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것이다. 글쓰기가 정보의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건 필히 규범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 글쓰기는 규범을 일탈하는 힘을 내장한다.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전달하려는 의도 뿐 아니라 그보다 많은 우연과 무의식적 편린들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옥이란 인물이 보여준 그의 행동들은 글을 쓰는 글쟁이로서의 자연스런 그만의 일탈이었을 것이라 생각되어졌다. 그만의, 자신만의 글쓰기를 위하여!!!
문체를 고치라는 왕(정조)의 명령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던 외골수 아티스트 이옥의 글을 읽는다. 자신의 문체를 지키기 위해 왕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으나 버려진 그 자리에서 자신이 버려졌다는 그 사실을 잊기 위해, 또 버려진 다른 사물/사람들과 공감하기 위해 읽고 썼던 자, 이옥. 이목구심(耳目口心)으로 토해진 그의 글을 읽으며 읽는다는 것, 쓴다는 것, 저항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긴다.
조선이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18세기 말 정조 시대, 연암과 다산처럼 한 시대를 온전히 밝혀낸 별들과 달리 이옥이라는 별은 작고 초라하다. 하지만 그를 빼놓고는 1792년의 문체반정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문체반정은 반드시 이옥과 함께 이야기되어야 한다. 문체반정은 군주의 정치권력 행사가 아닌, 조선의 전통적 글쓰기 담론에 심각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하나의 징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옥은 그 낡은 글쓰기로부터 미세하면서 재빠르게 또 끝까지 도주하면서 문체반정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18세기 말 조선의 문장가, 간혹 ‘문체반정의 희생자’로 혹은 조선 후기 ‘여성적 글쓰기’의 표본으로 그를 떠올리는 이도 있지만 대개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잊혀진 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성장과정이라든가 사승관계, 교우관계를 뚜렷이 알려주는 기록이 거의 없다. 당시 군주였던 정조의 화받이가 되어 유배지를 전전하며 오로지 읽고 쓰는 일 만 하였음에도 스스로 변변찮은 문집 하나 정리해 놓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1970년대에야 이옥의 글이 겨우 번역되기 시작했기에 아직은 그에 대해 밝혀진 사실도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러니 소신을 굽히지 않는 뚝심 하나는 제대로 갖춘 외골수 아티스트 와 같은 새로운 이름으로 그를 호명하는 자리도 아마 이 책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 가 처음일 것이다.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다 영상보기 *클릭*
책머리에
프롤로그, 이옥과 우리
1부,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ㆍ 호모 스크립투스의 자화상
ㆍ 용서받지 못한 자 : 이옥의 문체반정 수난사
ㆍ 이옥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정조와 문체반정
ㆍ 피도 눈물도 없이 : 글쓰기와 주체화 과정
ㆍ 세상의 끝에서 세상을 만나다 : 유배와 여행
ㆍ 너는 내 운명 : 김려, 이옥과 더불어 불멸하다
2부, 욕망의 글쓰기, 글쓰기의 욕망
ㆍ 글쓰기의 모든 어려움 : 이언 의 세계
ㆍ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 첫번째 도주선, 「일난」
ㆍ 애정만세 : 두번째 어려움, 「이난」
ㆍ 낮은 목소리들 : 세번째 어려움, 「삼난」
ㆍ 네 멋대로 해라 : 고문과 금문의 변증법을 넘어
ㆍ 취하고 토하라 : 독서론과 문장론
3부, 카메라를 든 사나이 : 낯선 세계로의 여행
ㆍ 금지된 장난 : 빠지다, 미치다
ㆍ 인섹토피디아, 미지의 세계와의 조우
ㆍ 사물들 사이에서 나를 잃다 : 인간주의를 넘어서
ㆍ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 형용사의 세계, 부유하는 시선
ㆍ 연경 , 만국의 흡연자들에게 보내는 우정의 서
4부, 경계에서, 연대하라
ㆍ 생활의 발견 : 삶들, 이야기들
ㆍ 마이너리티 리포트 : 길 위의 인생들로부터 배우다
ㆍ 마음의 헤테로토피아 : 정과 욕을 허하라!
ㆍ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 여성-되기와 글쓰기
ㆍ 징후와 세기 : 동시대적 공감과 반시대적 글쓰기
에필로그, 이옥의 글쓰기, 세상과 공명하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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